공부

공부를 잘하는 방법?

바랭이22 2020. 4. 6. 04:13

 초중고 학창 시절의 경우 공부는 내게 스스로 꼭 해야만 하는 내 인생을 바꾸어줄 수 있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특히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서 검사의 꿈을 꿨던 어린 초등학생에게 공부는 당연한 나의 일상 그 자체였던 듯 싶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해야 되는 당위성을 알더라도 막상 공부보다는 노는 게 재미가 있고 공부를 하다 보면 힘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어려서부터 체격도 작고 운동을 특별히 잘하지도 않고 공부도 특출 나게 잘하지도 않고 너무나도 평범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친구들이 기억하는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의 내 존재감은 전무했던듯하다. 

 
 초등학교 시절 집 앞의 월 학원비 5만 원 정도의 영어,수학 보습학원을 다니면서 학원이 끝나면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하는 게 그 당시 내 최고의 행복이었다.

 지금은 게임을 정말 못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동네에서 꽤나 잘했던듯싶다. 대결 격투 게임에서 10판에 9판은 상대방을 이겼다. 친구들도 오락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도전하여질 거 같은 경우 나에게 부탁을 해서 내가 승리로 이끌었던 기억이 꽤나 많다.

 너무 오락실을 다니니 학원이 끝나고도 집에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져 엄마가 오락실을 돌아다니시면서 나를 찾으시고 혼을 내시면서 끌고 오셨다. 그때 당시는 너무도 무서웠고 싫었었는데 지금은 기분 좋은 추억이다.

 보습학원에서 영어 수학의 경우 1년 정도 선행학습을 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 당시 특별히 공부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음악은 많이 어려웠다. 시간이 오래돼 기억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험 준비 공부를 할 때 음악 특유의 기전을 잘 이해 못했던듯싶다. 열심히 공부는 했는데 점수도 잘 안 나오고 이해도 잘 안 돼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시절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녔던 집 앞 보습학원재미있게 다니고 효과도 잘보던중 부모님께서 갑자기 지역에서 가장 비싸고 인재들이 모인다는 학원 개원 소식을 듣고 나를 그 학원에 입학시켰다.

 학원비도 월 27만 원 수준으로 매우 비쌌고 아무나 들어가는 학원이 아닌 시험을 보고 들어갈 수 있는 학원이었다. 근처 다른 시에서까지 올 정도로 유명세가 있었고 소위 공부로든 집안이든 잘 나가는 사람들이 왔던 학원이었다.

대 략 9월쯤 개원을 했었고 나는 11월쯤에 시험을 보고 간신히 합격을 해서 수업을 듣게 됐다. 그 학원은 시험을 보고 결과 순으로 A반 B반 C반으로 나누고 번호도 성적순으로 교부가 됐다. 나는 그 당시 C반 40번이었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었다. 이게 성적순으로 반이 나뉘고 번호도 배정이 된걸. 그런데 번호의 의미는 학원 다니고 며칠이 안돼 알게 됐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몇 명이 내 자리 근처에서 이야기하면서 여기 40번 꼴등이 누구냐? 하는 이야기를 했고 내가 마침내 자리로 들어오는 중이어서 나는 그 이야기를 정제 없이 제대로 듣게 됐다.

 처음 개원 당시보다 2개월 늦게 학원에 들어와서 아는 친구도 아무도 없는데 이미 빨리 입학했던 친구들은 서로 친해있었던 데다가 나의 경우 학원 통틀어 성적으로 꼴등을 주홍글씨처럼 번호에 각인이 돼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학원을 다니기 싫어했을지 누구나 짐작이 갔을 테다.

 나는 엄마에게 울고불고 학원 다니기 싫다고 계속 떼를 썼고 엄마는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으셨다. 난 예전 다니던 보습학원이 그리웠고 새로 옮긴 학원에 갈 때면 매일 우울감에 괴로운 날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 형편상 학원비도 꽤나 부담스러우셨을 텐데 부모님께서는 자녀들 교육에는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아낌없이 다 해주시고 싶었던 듯싶다. 10원도 허투루 안 쓰시던 부모님이셨는데 27만 원이라는 거금을 매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쓰셨으니 지금도 부모님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하긴 하다.

 부모님 사랑과는 별개로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게다가 여유로운 집 친구들도 많아서였는지 학원이 끝날 때면 자녀들을 데리러 오는 고급차의 부모님들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덤으로 날 힘들게 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그 모든 시련조차도 다 적응이 되고 어느 정도 다닐만하게 될 때쯤 나도 C반에서 B반으로 B반에서 A반으로 대략 2개월마다 시험을 통해 옮겨지게 됐다. 게다가 내가 A반으로 옮겨지게 될 때쯤에는 학원이 유명세를 타고 ABCDE반까지 그리고 각반당 학생수도 증원할 정도로 학원생이 늘어나게 됐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왜 처음 들어갔을 때 C반에서 가장 꼴등으로 들어갔을까 의문은 든다. 월반이 되는 동안 특별히 내 실력이 늘었던 거도 아니고 내가 더 열심히 했던 거도 아니었는데 미스터리이다.

 옮긴 학원에서 국영수에 과학까지 다 같이 배우긴 했지만 내 실력에 많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듯싶다. 오히려 예전 동네 보습학원을 다녔다면 더 결과가 좋았을 거라 혼자 생각해본다. 지금도 엄마랑 이야기를 할 때면 엄마는 종합학원으로 옮겨서 결과가 좋았다고 말씀하시고 나는 동네 보습학원에서 계속 있었음 더 결과가 좋았을 거라 말하고 있다. 

  중학교 때 나는 과학이 어려웠다.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냥 외우기만 했는데 그것도 좀 어려웠다. 역사는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가끔 100점 만점에 14점이 나왔던 적도 있었던걸 보면 좋아하는 거랑 잘하는 거랑은 별개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 점수가 나에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14점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배정이 됐다.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밤 10:30분 정도에 끝나서 학원은 다닐 상황도 아니었고 학교에서 그냥 계속 공부만 했다.

 원래 고3부터 기숙사 입학이 가능했는데 학교 가는 길 집에 가는 길 만원 버스가 너무 힘들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때 추억도 많고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지만 공부만 했던 기억 그리고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웠던 기억만 또 몸무게가 58kg까지 빠졌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는 지구과학이 제일 어려웠다. 공간지각력이 좀 부족했던지라 지구 과학시간 지구 주위로 달이 돌면서 새벽에는 어떤 모양으로 보이고 밤에는 어떤 모양으로 보이고 이런 부분들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이해 안 되는 부분은 계속해서 보고 안되면 외워버렸다. 국영수는 어느 정도 잘했던지라 모의고사 수능은 나쁘지는 않았다.

 대망의 수능. 전날 잠도 잘 자고 수능날 시험도 잘 보고 컨디션도 괜찮았었다. 성적은 대략 상위 3프로 안에 들었고 학교 선생님들의 압박에 의해 특차로 서울대 독어교육학과 지원하고 떨어졌다. 정시에서 서울대 종교학과 지원후 떨어지고 한국외대 영어영문학과 합격했으나 그냥 과감히 포기하고 재수의 길로 들어가게 됐다.

 공부하는 잘하는 방법이라고 써놓고 이상한 글만 적어놓았다. 다음 글에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