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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리스찬 베일 주연의 영화 더 프로미스를 보고

  오늘 오래간만에 영화를 한편 봤다. 1차 세계대전 배경의 더 프로미스란 영화인데 몰입도도 좋았고 재미도 있었다.

 

  당시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말살정책을 행하고 있었다. 오스카 아이삭이 아르메니아인 의대생으로 나오고 크리스천 베일이 미국인 기자로, 샤롤르본이 아르메니아인 과외 선생님으로, 마르완 켄자리가 부유한 터키 집 자제 의대생으로 나왔다. 오스카 아이삭, 샤롤르본, 크리스천 베일이 삼각관계를 이루며 영화가 진행되고 마르완 켄자리는 크리스천 베일과는 원래 알던 지인으로 오스카 아이삭과는 의과 대학에서 알게 된 사이로 나온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정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터키의 아름다운 배경과는 반대로 점점 미쳐가는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도 그 와중에 주인공들의 범인류애적 이타심은 무척이나 돋보인다. 2시간이 넘는 영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가는줄 모르고 금방 끝날만큼 긴장감도 있었다. 

 

  영화는 중간중간에 로맨스도 보여주지만 전쟁의 참혹함보여주는데 주로 초점을 맞춘다. 영화를 보게 되면 누구나 전쟁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다.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주연들의 연기나 역할은 말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조연으로 나온 마르완 켄자리가 맡은 역할 또한 생각하게 한다.

 

  마르완 켄자리는 바람둥이로 군대에 징집되기 싫어 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공부에는 관심없고 노는데만 관심이 많지만 의리도 있고 정도 많다. 하지만 오스카 아이삭을 도와주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군대에 징집됐고 군대에서도 크리스천 베일을 도와주다 크리스천 베일 대신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본인이 충분히 난처한 상황에 빠질걸 예상하고도 결국 도와주었던 상황이다. 

 

 과연 마르완 켄자리의 행동은 맞는것일까? 본인을 희생하면서 남을 도와주는 게 가능한 건가? 물론 본인이 희생되지 않길 바라면서 설마 문제가 생길까 하면서 조심스럽게 도와주긴 했지만 분명 위험성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다. 남을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경우를 가끔 신문에서도 본다. 특히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보통 마르완 켄자리처럼 위험성은 인지하지만 본인이 희생하지 않고도 남을 도와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 만약 본인의 목숨을 희생하는 상황이 명확한데도 남을 도와주는 경우가 있을까? 

 

  본인의 목숨마저도 희생하면서 타인을 도와주는 경우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종종 보인다. 하지만 혈연의 관계가 아닌 이상 선뜻 희생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희생이란 정말 숭고한 명제이지만 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남을 위해 희생을 하는 선택이 본인은 물론이고 본인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아픔을 줄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이런 상황에서는 가치 판단하기가 정말 어렵다.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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